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이자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었다. 1751년 나폴리에서 태어나 1759년 스페인 왕위에 오른 부왕 카를로스 3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스포츠맨으로 성장했으며, 아내 마리아 카롤리나 여왕에게 정치를 일임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반혁명 세력에 가담했으나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시칠리아로 피난했고, 빈 회의를 통해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820년 나폴리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했으며, 1825년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양시칠리아의 군주 - 프란체스코 1세 (양시칠리아)
프란체스코 1세는 양시칠리아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로, 1825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보수적인 정치를 펼치며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 양시칠리아의 군주 - 프란체스코 2세 (양시칠리아)
프란체스코 2세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으로, 가리발디의 침공과 사르데냐 왕국의 남하로 왕국이 멸망하면서 폐위되었고, 망명 생활 중 사망 후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되었다. -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가 - 프란체스코 1세 (양시칠리아)
프란체스코 1세는 양시칠리아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로, 1825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보수적인 정치를 펼치며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가 - 마리아 카롤리나 폰 외스터라이히
마리아 카롤리나 폰 외스터라이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부부의 딸로 태어나 나폴리 왕비가 되었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남편을 대신하여 나폴리 왕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며 반혁명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망명 후 오스트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 스페인의 왕자 -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1556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526년부터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1521년부터 오스트리아 대공을 지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분가를 창시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기틀을 마련, 종교 갈등을 조정하여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이끌어냈고 중앙집권화와 가톨릭 부흥을 추진했다. - 스페인의 왕자 - 카를로스 2세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후계자 부재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야기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말을 가져온 스페인 국왕이다.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전체 이름 | 페르디난도 안토니오 파스콸레 조반니 네포무체노 세라피노 젠나로 베네데토 디 보르보네 |
왕가 | 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 |
종교 | 가톨릭 교회 |
![]() | |
통치 | |
양시칠리아 왕 | pre-type1: reign: 1816년 12월 12일 – 1825년 1월 4일 successor: 프란체스코 1세 |
나폴리 왕 | pre-type1: 1차 통치 predecessor1: 카를로스 7세 reign1: 1759년 10월 6일 – 1799년 1월 23일 cor-type1: 2차 통치 coronation1: 1799년 6월 13일 – 1806년 3월 30일 reign-type1: 3차 통치 reign1: 1815년 5월 22일 – 1816년 12월 12일 suc-type1: 전임 successor1: 카를로스 7세 |
시칠리아 왕 | reign2: 1759년 10월 6일 – 1816년 12월 12일 predecessor2: 카를로스 3세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751년 1월 12일 |
출생지 | 나폴리 왕국 나폴리 왕궁 |
사망일 | 1825년 1월 4일 |
사망지 |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
매장지 | 나폴리 산타 키아라 대성당 |
아버지 | 카를로스 3세 |
어머니 | 마리아 아말리아 폰 작센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마리아 카롤리나 다즈부르고 (1768년 결혼, 1814년 사망) 루치아 밀리아초 (1814년 결혼) |
자녀 | 마리아 테레사, 신성 로마 황후 루이사 마리아, 토스카나 대공비 카를로, 칼라브리아 공작 마리아 안나 공주 프란체스코 1세, 양시칠리아 왕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르데냐 왕비 젠나로 왕자 주세페 왕자 마리아 아말리아, 프랑스 왕비 마리아 안토니아, 아스투리아스 여공 마리아 클로틸데 공주 마리아 엔리케타 공주 레오폴도, 살레르노 공작 알베르토 왕자 마리아 이사벨라 공주 |
2. 생애
1751년 나폴리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카를로 국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59년 부왕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이 되었다. 당시 그의 섭정이었던 베르나르도 타누치는 자신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군이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하게 했고, 이에 페르디난도는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스포츠맨으로 자라난 반면 정치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1768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하였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페르디난도와는 달리 최고의 교육을 받은 데다 정치적 야심도 강했다. 그녀는 타누치를 해임하고 영국인 존 액턴을 그 자리에 앉혔다. 페르디난도는 정치에 관한 부분은 아내에게 일임한 채 점차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1793년 오스트리아 대공국, 영국과 동맹을 맺어 반혁명 세력에 가담했고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가 나폴리에 도착하자 용기를 얻고 179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로마 공화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1798년 12월 21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침공해 파르테노테 공화국을 선포하자 페르디난도는 시칠리아로 도망쳤다.[2][4] 1799년 공화국이 전복되자 다시 나폴리로 돌아와 옛 공화국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1806년 나폴레옹군이 다시 나폴리를 점령하자 다시 팔레르모로 피난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나폴리의 왕으로 앉혔지만 페르디난도는 영국의 보호 하에 임시로 시칠리아를 다스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조제프의 뒤를 이어 즉위했던 조아키노 1세 또한 퇴위했고 페르디난도는 빈 회의에서 정해진 대로 나폴리로 돌아와 1816년 12월 1일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로 즉위하였다. 1820년 헌법을 부여했고, 1821년부터 의회에 참석해 오스트리아 제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1820년 카르보나리에 의해 일어난 나폴리 혁명 후에는 왕비의 고향 빈으로 망명했다. 만년에는 아브루초주와 리에티에서 지냈으며, 1821년부터 의회에 참석해 오스트리아 제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오스트리아의 승리 이후, 의회는 해산되었고 페르디난도는 자유주의자들과 카르보나리를 탄압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승리를 이용하여 나폴리의 국내 및 외교 정책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샤를루이 드 피켈몽 백작(Count Charles-Louis de Ficquelmont)이 오스트리아의 대사로 나폴리에 임명되어 사실상 국가를 통치하고 점령을 관리하며 나폴리 엘리트들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페르디난도는 1825년 1월 4일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카를 3세의 마지막 생존 자녀였다.
2. 1. 어린 시절
1751년 나폴리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카를로 국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카를로스 3세와 마리아 아말리아 폰 작센의 셋째 아들이자 카를로스 4세의 동생이다. 그는 포르티치 궁전, 카세르타 궁전,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 등 부친이 나폴리에 세운 많은 기념물들에서 성장했다.1759년 부왕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이 되었다. 당시 그의 섭정이었던 베르나르도 타누치는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군이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하게 했고, 페르디난도는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스포츠맨으로 자라난 반면 정치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유능하고 야심 찬 타누치는 가능한 한 정부를 자신의 손에 쥐고 싶어 했기에, 의도적으로 어린 국왕의 교육을 소홀히 했고, 그가 쾌락을 즐기고, 게으름을 피우며, 야외 스포츠에 과도하게 몰두하도록 부추겼다.
1768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하였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페르디난도와는 달리 최고의 교육을 받은 데다 정치적 야심도 강했다. 페르디난도는 왕비에게 푹 빠졌지만, 왕비는 그의 교양 없음과 예절 부족을 "귀여운 바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좋았고, 자녀를 많이 낳아 가정생활은 행복했다. 결혼 시 약속 중 하나는 왕자를 낳으면 왕비가 섭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왕자 탄생 후 정치적 실권은 완전히 마리아 카롤리나가 쥐고 있었으며, 페르디난도는 사냥과 사교에 전념했다.
2. 2. 치세
1751년 나폴리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카를로 국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 1759년 부왕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이 되었다.[4] 당시 그의 섭정이었던 베르나르도 타누치는 자신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군이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하게 했고, 이에 페르디난도는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스포츠맨으로 자라난 반면 정치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4]1768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하였다.[4] 마리아 카롤리나는 페르디난도와는 달리 최고의 교육을 받은 데다 정치적 야심도 강했다. 그녀는 타누치를 해임하고 영국인 존 액턴을 그 자리에 앉혔다. 페르디난도는 정치에 관한 부분은 아내에게 일임한 채 점차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1793년 오스트리아 대공국, 영국과 동맹을 맺어 반혁명 세력에 가담했고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가 나폴리에 도착하자 용기를 얻고 179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로마 공화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1798년 12월 21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침공해 파르테노테 공화국을 선포하자 페르디난도는 시칠리아로 도망쳤다.[2][4] 1799년 공화국이 전복되자 다시 나폴리로 돌아와 옛 공화국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1806년 나폴레옹군이 다시 나폴리를 점령하자 다시 팔레르모로 피난했다.[4]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나폴리의 왕으로 앉혔지만 페르디난도는 영국의 보호 하에 임시로 시칠리아를 다스렸다.[4]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조제프의 뒤를 이어 즉위했던 조아키노 1세 또한 퇴위했고 페르디난도는 빈 회의에서 정해진 대로 나폴리로 돌아와 1816년 12월 1일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로 즉위하였다.[4] 1820년 헌법을 부여했고 1821년부터 의회에 참석해 오스트리아 제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페르디난도는 이제 오스트리아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오스트리아인인 누젠트 백작이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4년 동안 페르디난도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절대 군주로서 통치하며 헌법 개혁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적 의견에 대한 탄압은 카르보나리의 비밀 결사의 영향력과 활동을 심각하게 확산시켰고, 이는 결국 군대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4] 1820년 7월, 구글리엘모 페페 장군 휘하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페르디난도 1세는 1812년 스페인 헌법을 모델로 한 헌법에 서명하도록 위협을 받았다.[4] 한편, 독립 회복을 요구하는 시칠리아의 반란은 나폴리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820년 카르보나리에 의해 일어난 나폴리 혁명 후에는 왕비의 고향 빈으로 망명했다.
2. 3. 말년
1820년 카르보나리에 의해 일어난 나폴리 혁명 후에는 왕비의 고향 빈으로 망명했다. 만년에는 아브루초주와 리에티에서 지냈으며, 1821년부터 의회에 참석해 오스트리아 제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오스트리아의 승리 이후, 의회는 해산되었고 페르디난도는 자유주의자들과 카르보나리를 탄압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승리를 이용하여 나폴리의 국내 및 외교 정책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샤를루이 드 피켈몽 백작(Count Charles-Louis de Ficquelmont)이 오스트리아의 대사로 나폴리에 임명되어 사실상 국가를 통치하고 점령을 관리하며 나폴리 엘리트들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페르디난도는 1825년 1월 4일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카를 3세의 마지막 생존 자녀였다.
3. 인물
페르디난도 1세는 여성의 손, 특히 장갑을 낀 손에 페티시를 느꼈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부탁이 있을 때마다 긴 장갑을 낀 손을 그에게 내밀었고, 페르디난도는 황홀해하며 왕비의 소원을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서민의 음식이었던 가느다란 면의 파스타(스파게티)를 좋아하여 궁정에서 제공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스파게티는 손으로 집어먹는 것이었기에, 마리아 카롤리나로부터 품위가 없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이 때문에 파스타를 먹는 도구로서 포크가 채택되었다고 한다.
4. 가족 관계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라와 재혼.